국경 간 결제는 송금이 아니라 '경로 탐색'이다

해외송금은 목적지 계좌를 아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Reachability, Liquidity, Compliance, Timing을 모두 만족하는 경로를 찾아야 하는 이유를 ‘화물차 내비게이션’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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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간 결제가 ‘화물차 내비게이션’과 닮은 이유


해외송금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메일처럼 쉽고 빠르게 돈을 보낸다.”

스테이블코인이나 블록체인 기반 결제를 이야기할 때도 비슷한 설명을 많이 합니다.

서울에서 버튼을 누르면
몇 초 뒤 뉴욕이나 싱가포르에 돈이 도착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실제 국경 간 결제(Cross-border Payment)는
이메일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받는 사람의 계좌번호를 알고 있다고 해서
돈이 바로 도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국경 간 결제는 ‘돈을 보내는 일’보다
‘돈이 지나갈 수 있는 경로를 찾는 일’
에 가깝습니다.

해외송금은 돈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길을 찾는 일입니다.


일반 내비게이션과 화물차 내비게이션은 다릅니다


승용차로 목적지를 찾아간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보통은 목적지를 입력하고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면 됩니다.

하지만 대형 화물차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차량 높이가 낮은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지,
중량 제한이 있는 다리를 건널 수 있는지,
화물차 진입이 금지된 도로는 없는지,
특정 시간에 통행이 제한되는 구간은 없는지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갈 수 있는 길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국경 간 결제도 비슷합니다.

한국에서 어느 나라의 특정 은행으로 돈을 보내려 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수취은행의 이름과 계좌번호를 알고 있어도
그것만으로 결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은행까지 연결되는 금융기관이 있어야 하고,
필요한 통화의 유동성이 있어야 하며,
각 금융기관의 규제와 내부통제를 통과해야 하고,
각국의 결제망 운영시간도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국제결제에는 일반 송금보다 훨씬 많은 조건이 붙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도달가능성(Reachability)입니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도달 가능성(Reachability)입니다.

은행이 전 세계 모든 은행과 직접 연결돼 있는 것은 아닙니다.

A은행이 B은행에 직접 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중간 은행을 거쳐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은행 → 미국의 중개은행 → 현지 중개은행 → 수취은행
처럼 여러 금융기관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각각의 연결은 하나의 ‘도로’와 같습니다.

따라서 국제결제에서는 단순히 목적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목적지까지 연결되는 금융 네트워크가 존재하는가가 먼저 중요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유동성(Liquidity)입니다


길이 있다고 해서 언제든 돈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경로에 유동성(Liquidity)이 있어야 합니다.

은행들은 해외 지급결제를 위해
다른 나라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필요한 통화를 미리 보유하기도 합니다.

이를 흔히 Nostro Account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달러 결제를 처리하려면 필요한 시점에 달러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좌가 연결되어 있어도
필요한 통화가 부족하거나 한도를 넘으면 결제는 지연될 수 있습니다.

도로는 있지만 화물차가 지나갈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국제결제에서는 연결성과 유동성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조건은 Compliance입니다


국경을 넘는 돈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규제와 컴플라이언스(Compliance)입니다.

송금인과 수취인은 누구인지,
거래 목적은 무엇인지,
제재 대상과 관련된 거래는 아닌지,
자금세탁이나 금융범죄 위험은 없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한 금융기관에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거래라도 중간에 있는 다른 금융기관의 기준에서는 추가 확인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국가마다 규제도 다르고 금융기관마다 리스크 관리 기준도 다릅니다.

그래서 국제결제에서는

“기술적으로 갈 수 있는 길”과
“규제상 갈 수 있는 길”이 다를 수 있습니다.

블록체인이나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더라도 이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돈의 이동 방식이 달라질 뿐,
금융기관이 고객과 거래의 위험을 판단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은
그대로 남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조건은 타이밍(Timing)입니다


마지막으로 시간(Timing)도 중요합니다.

전 세계 금융시장은 아직 하나의 시간표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각 나라의 결제시스템 운영시간이 다르고,
은행마다 업무 마감시간(Cut-off time)이 있으며,
주말과 공휴일도 서로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정상 영업일이지만 상대 국가에서는 휴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간에 여러 금융기관을 거칠수록
시간 조건은 더 복잡해집니다.

국경 간 결제에서 ‘24시간’이라는 가치가
중요하게 거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서버를 24시간 켜놓는 문제가 아닙니다.

결제 경로에 참여하는
여러 기관과 통화가 실제로 함께 움직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Path Discovery

길 찾기(Path Discovery)에 필요한 4가지 질문

Message
A D
Settlement
A B C D
Routing은 단순히 가장 짧은 길을 찾는 문제가 아닙니다.
Reach · Liquidity · Compliance · Time 을 동시에 확인해야 합니다.
01 · REACH

갈 수 있나?

도달 가능성
선택한 경로를 통해 최종 수취기관까지 실제 정산할 수 있는가?

02 · LIQUIDITY

지금 가능한가?

유동성
필요한 통화와 한도가 확보되어 있고, 결제를 완료할 수 있는가?

03 · COMPLIANCE

해도 되나?

규제 적합성
AML·제재·규제 기준상 해당 경로와 거래를 처리할 수 있는가?

04 · TIME

언제 되나?

운영 가능성
운영시간·컷오프·휴일과 SLA를 고려할 때 원하는 시점에 완료되는가?

DAF Lens framework · FSB와 BIS CPMI가 제시한 국경 간 지급결제의 구조적 마찰요인을 Path Discovery 관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그래서 국제결제는 네 가지 조건의 교집합입니다


정리하면 국경 간 결제가 성립하려면 적어도 네 가지 조건을 함께 만족해야 합니다.

Reachability
목적지까지 실제 금융 네트워크가 연결돼 있는가

Liquidity
그 경로에 필요한 통화와 한도가 준비돼 있는가

Compliance
거래가 각국 규제와 금융기관의 위험관리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가

Timing
필요한 시점에 결제망과 금융기관이 실제로 작동하는가

이를 단순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Cross-border Payment
= Reachability × Liquidity × Compliance × Timing

네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결제가 지연되거나 다른 경로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국제결제의 문제는 단순히 ‘속도가 느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조건을 만족하는 경로가 복잡하고 제한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스테이블코인이 국제결제에서 주목받는 이유도
이 관점에서 보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퍼블릭 블록체인은 기본적으로 전 세계에서 접근할 수 있고 24시간 운영됩니다.

기존 금융기관 간 연결보다 훨씬 넓은 네트워크를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Reachability와 Timing 측면에서는 분명 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문제까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지급에 필요한 유동성이 충분한지,
법정화폐와 스테이블코인을 어디에서 교환할 것인지,
송금인과 수취인의 신원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제재 대상 주소를 어떻게 걸러낼 것인지,
잘못된 거래나 사고가 발생하면 누가 대응할 것인지가 남습니다.

결국 블록체인이 새로운 도로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 도로에서 어떤 차량이 지나갈 수 있고
누가 교통규칙을 관리할 것인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더 빠른 길보다 더 많은 ‘갈 수 있는 길’이 중요합니다

국경 간 결제 혁신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속도와 비용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몇 초 만에 송금할 수 있다거나 수수료가 크게 줄어든다는 설명입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본질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목적지까지 안정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가입니다.

세계 어디에 있는 고객에게도
필요한 통화로,
규제를 준수하면서,
필요한 시간에,
예측 가능한 비용으로 돈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은 국제결제 네트워크입니다.

따라서 미래의 국제결제 경쟁은 단순히

“누가 가장 빨리 돈을 보내는가”

만으로 결정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누가 가장 많은 목적지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경로를 제공하는가”

가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예금, CBDC, 새로운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도
결국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기술이 바뀌어도 돈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경 간 결제를 이해할 때는
‘송금’보다 ‘경로 탐색’이라는 관점이 더 도움이 됩니다.

국제결제의 혁신은 단순히 더 빠른 차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길을 더 많이 만들고,
그 길의 규칙을 더 명확하게 만드는 일
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by Louis Kim, with Ari


이 글은 FSB와 BIS CPMI가 분석한 국경 간 지급결제의 긴 거래 체인, 유동성 부담, 컴플라이언스 처리와 운영시간의 차이를 참고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외송금을 단순히 A에서 D로 돈을 보내는 과정이 아니라, 도달 가능성(Reach), 유동성(Liquidity), 규제 적합성(Compliance), 시간(Time)을 동시에 확인하며 최적의 결제 경로를 찾는 문제(Path Discovery)로 재구성했습니다.

참고한 자료

Financial Stability Board (FSB)
Enhancing Cross-border Payments – Stage 1 report to the G20

April 2020
원문 보기

국경 간 지급결제에서 긴 거래 경로, 유동성·자금조달 비용, 복잡한 AML/CFT 확인, 서로 다른 지급결제시스템 운영시간과 상호운용성 부족이 주요 마찰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을 참고했습니다.
Committee on Payments and Market Infrastructures (CPMI), BIS
Enhancing cross-border payments: building blocks of a global roadmap

July 2020
원문 보기

FSB가 식별한 국경 간 지급결제의 구조적 마찰을 바탕으로 상호운용성, 유동성 관리, 규제·컴플라이언스와 지급결제 인프라 개선을 19개의 Building Block으로 구체화한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Committee on Payments and Market Infrastructures (CPMI), BIS
Extending and aligning payment system operating hours for cross-border payments

May 2022
원문 보기

국가별 RTGS 운영시간의 차이가 국경 간 결제의 지연뿐 아니라 유동성 비용과 결제 리스크를 높일 수 있으며, 운영시간 확대와 정렬이 이를 완화할 수 있다는 분석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