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샌드박스에서 ‘기획형 시장설계’로
규제 샌드박스가 개별 기업의 예외를 허용하는 제도에서 미래 금융의 구조를 함께 실험하는 플랫폼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기획형 샌드박스가 금융시장 설계에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규제 샌드박스는 보통 기업이 먼저 움직이는 제도입니다.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었는데
기존 법이나 규정 때문에 실행하기 어려우면
기업이 규제특례를 신청합니다.
당국은 위험을 검토한 뒤
일정한 조건 아래 예외를 허용합니다.
지금까지는 꽤 합리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AI와 디지털자산처럼
기술과 시장구조가 빠르게 바뀌는 분야에서는
이 방식만으로 충분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든 뒤 규제의 문을 두드리는 것보다,
시장에 필요한 과제를 먼저 정하고
당국과 여러 사업자가 함께 실험하면서
제도 자체를 만들어가는 방식이
더 중요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 샌드박스는 ‘예외를 허용하는 제도’에 가까웠습니다
기존 구조를 단순화하면 이렇습니다.
기업이 서비스를 기획합니다.
현행 규제와 충돌하는 부분을 찾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특례를 신청하고,
승인을 받으면 제한된 범위에서 서비스를 운영합니다.
'비즈니스 → 특례(예외 조항) → 실증' 의 흐름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도 밖에서 바로 막지 않고
일단 시험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샌드박스는 금융혁신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개별 기업의 서비스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시장을 만들기 위해
여러 기관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경우에는
한계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디지털자산은 한 회사의 예외만으로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토큰화 증권' 시장을 만든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토큰을 발행하는 회사 하나만
규제특례를 받는다고 시장이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발행 이후 거래가 가능해야 하고,
결제수단이 연결되어야 하며,
자산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투자자 보호와 AML, 회계와 법적 권리관계도 함께 정리되어야 합니다.
Stablecoin이나 Tokenized Deposit도 비슷합니다.
하나의 회사가 기술을 잘 만든다고
바로 금융 인프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행과 지급결제기관, Wallet과 Custody, 거래 인프라와 규제기관이
같은 규칙 아래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디지털자산 생태계에서는
'특정 회사의 서비스를 허용하는 것'보다
'시장 구조를 설계 하는 것'이 더 큰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기획형 샌드박스는 출발점이 다릅니다
2026년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금융규제 샌드박스 개선방안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획형 샌드박스'입니다.
기존 방식에서는 사업자가 서비스를 만든 뒤 특례를 신청했다면,
기획형 방식에서는
정부가 미래 금융에서 필요한 과제를 발굴하고,
참여 사업자를 모집해 실증을 진행한 뒤
그 결과를 제도개선으로 연결합니다.
규제 샌드박스의 역할이
개별 기업의 규제 애로를 해결하는 데서
미래 금융시장의 구조를 시험하는 도구로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규정과 실험을 순서대로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통적인 제도 설계는 보통 순차적입니다.
정책을 검토하고, 법과 규정을 만든 뒤, 시장에 적용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에서는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운영해보기 전에는
어떤 위험이 발생하고, 규정이 불필요한지,
어디에 새로운 통제가 필요한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책 논의와 실증을
하나의 반복 과정으로 보는 방식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책 가설 → 제한된 실증 → 운영 데이터 → 제도 설계 → 확산
정책 토론을 통해 쟁점을 먼저 좁히고,
Sandbox에서 실제 데이터를 확보한 뒤,
그 결과를 다시 규칙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규제가 기술을 뒤따라가는 구조에서
규제와 시장이 함께 학습하는 구조로 바뀌는 셈입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금융인프라 자체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Digital Securities Sandbox(DSS) 제도가 대표적입니다.
영란은행과 FCA는
단순히 특정 기업의 신사업을 허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DLT를 이용한 증권의 발행·거래·결제를
실제 금융시장 환경에서 단계적으로 시험하고 있습니다.
참여자는 Testing 단계에서 시작해
제한된 Live Business, Scaling을 거쳐
향후 정식 제도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검증합니다.
특히 FCA는 DSS를 실제 환경에서 법률 변경을 시험하고,
그 경험을 향후 규제체계에 반영하는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EU의 DLT Pilot Regime 역시
기존 증권 규제의 일부를 조건부로 완화하면서
DLT 기반 거래와 결제 인프라가
제도권 금융시장에서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시험합니다.
싱가포르의 Project Guardian은 접근 방식이 조금 다르지만
방향은 비슷합니다.
MAS가 금융회사들과 함께
Asset Tokenization, FX, Fixed Income 등의 Use Case를 정하고,
실증을 통해 기술뿐 아니라
표준과 시장 관행까지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금융시장이 생긴 뒤 규제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규제의 구조를 함께 시험한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한국에서도 이미 비슷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국내에서도 전혀 새로운 방식은 아닙니다.
한국은행의 프로젝트 한강처럼
당국이 큰 실험 구조를 만들고
여러 은행과 기관이 그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화폐와 지급 방식을 검증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에서는
개별 회사가 자신의 서비스를 증명하는 것보다
여러 기관이 같은 인프라에서
어떤 규칙으로 함께 움직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험의 목적도 단순히 “기술적으로 가능한가”를 확인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금융에 적용하면
어떤 규칙이 필요한지까지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음 제도 설계의 재료가 됩니다.
금융회사의 참여 방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금융회사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기존 샌드박스에서는
“우리 서비스에 적용할 수 있는 특례가 무엇인가” 를 먼저 검토했다면,
기획형 시장설계에서는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미래 금융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보고,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Stablecoin을 다룬다면
누가 발행할지만 볼 것이 아니라
상환·정산·유동성·AML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Tokenization이라면
토큰 발행 기술보다 거래와 결제, 보관이 이어지는 시장 구조가 중요합니다.
AI Agent Payment도
AI 서비스를 하나 만드는 문제보다
권한 위임과 거래지시, 책임과 감사 체계를 어떻게 금융규칙 안에 넣을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참여 단위도
'상품과 서비스 단위'에서 '시장 인프라'로 조금씩 넓어질 수 있습니다.
샌드박스는 실험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다만 기획형 샌드박스가 많아진다고
자동으로 좋은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증이 반복되지만
정식 제도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결국 PoC가 늘어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금융위 개선안에서
기획형 샌드박스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증 이후의 제도권 전환입니다.
운영성과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성과가 확인된 서비스는
법령 정비와 인·허가로 연결하는 구조입니다.
Sandbox의 목적이 예외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를 통해 배운 것을 정상적인 금융규칙으로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기존 작성 글(디지털자산 정책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예측 가능성이다)에서
이야기했던 '정책의 예측 가능성'과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실험의 시작뿐 아니라
성공했을 때 어떤 제도로 이동하는지가 보여야
기업도 장기적인 투자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규제도 ‘개발’하는 시대가 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술이 먼저 나오고
규제가 뒤따라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변화 속도가 빨라질수록
이 시간차는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모든 새로운 서비스를
법에 미리 적어두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시장에 필요한 과제를 정하고,
통제된 환경에서 먼저 운영해보고,
그 과정에서 데이터를 확보하고,
그 결과로 규칙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소프트웨어가 Build → Test → Learn → Improve 과정을 반복하듯,
금융제도도 Design → Test → Learn → Rule 의 과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규제 샌드박스의 다음 단계는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닐 수 있습니다.
‘허용받은 예외’에서
‘함께 만드는 금융시장’으로 이동하는 것.
기획형 샌드박스가 의미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변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by Louis Kim, with Ari
참고한 자료
금융위원회
혁신 서비스 도전의 문턱을 낮추고, 제도권 금융 전환도 질서있게 이루어지도록 금융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개선하겠습니다
June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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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형 샌드박스 활성화와 규제특례 범위 확대, 실증 이후 법령정비와 제도권 전환을 연결하는 금융규제 샌드박스 개편 방향을 참고했습니다.
Financial Conduct Authority · Bank of England
Digital Securities Sandbox
Jun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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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T 기반 증권의 발행·거래·결제를 통제된 실제 시장환경에서 단계적으로 운영하고, 실증 결과를 향후 영구적인 규제체계로 연결하는 구조를 참고했습니다.
European Securities and Markets Authority (ESMA)
DLT Pilot Re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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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T 기반 시장 인프라에 대해 일정한 규제특례를 적용하면서 거래와 결제 구조를 실제 시장에서 검증하는 EU의 접근을 참고했습니다.
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
Project Guardian
Jun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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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과 글로벌 금융기관이 Asset Tokenization의 Use Case와 표준,
시장 관행을 공동으로 검증하는 방식을 참고했습니다.